여러분 잘 지내고 있나요?? 얘들아.. 보고싶다...ㅠㅠㅠ
우선, 지난 시간 정답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시간 정답 공개>
인재 등용 : 무능하고 타락한 관리들은 내쫓고 능력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투명한 정치를 실시하고자 함. 당파, 가문에 상관 없이 (능력 )에 따라 사람을 등용
(서원) 철폐 : 죽은 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가르치던 서원에 양반들이 막대한 세금을 사용함. 서원에 들어가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철폐함.
(호포제) 실시 : 한 사람이 아닌 집집마다 1포의 군포를 걷는 제도로 (양반)도 세금을 내야 함.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함.
-> 조세제도 아니냐고 질문한 친구들이 있는데 잘 보면 조세제도는 세금 내는 제도라는 뜻이고, 이를 고쳐서 호포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탐관오리 척결 :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을 처벌함.
(비변사) 폐지 : 임진왜란과 같은 위급 상황에 정치, 군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비변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며 악질 기구로 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없애고 비변사 대신 정치는 (의정부), 군사는 (삼군부)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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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울 내용은 바로~!! 오랜~만에 하는 ‘오늘 무슨날이게~??’입니다.
오늘 다룰 내용은 바로 내일인 4월 3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년에 우리 배웠는데 기억할까요??
바로 제주도 4.3사건입니다+_+ 제주도에서 이 시기 엄청난 학살이 벌어졌었는데요.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링크에 들어가서 동영상을 먼저 봅니다.
선생님이 올린 한글파일을 읽어봅니다. (한글이 안열리면 아래 내용을 참고하세요^^)
아래 링크에 들어가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해봅니다. (오늘은 별로 안어렵당!!)
4.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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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무슨날이게?? - 제주 4.3사건
제주 4 · 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 극심한 흉년 등이 겹쳤으며, 일제에 부역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개인의 이익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 · 1절에 경찰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일반 주민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결과, 제주 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 · 10 총파업' 에 동참하였다. 미군정은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극우 단체를 대거 동원하였다. 이로부터 4 · 3 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 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극우단체의 무자비한 탄압 중지, 남한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였다.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 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다음 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 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국가의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그 지역은 사법권 및 행정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계엄 사령관이 행사할 것을 국가 원수가 선포하는 명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해발 100∼300미터의 고지대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난폭한 행동으로 소란을 일으켜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무리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산간 마을에 대대적 진압 작전이 실시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 명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었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 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 작전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 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대장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 · 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1948년 12월에 국가 보안법이 시행됨에 따라,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단체 가입자와 요시찰자사상이나 보안 문제와 관련하여 당국의 감시를 받는 사람 그리고 산에 들어간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 · 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드나들지 못하게 한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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